역몽
주술회전/고죠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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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꿈을 꾼다. 미래에 관한 꿈. 나이는 뒤죽박죽으로 어느 날은 졸업식 중이기도 했고 또 어느 날엔 다 같이 모여 술을 마셨다. 개중엔 사토루와 사귀는 내용도 있었다. 사토루는 다른 내용들엔 무관심하다가도 「우리 둘이 사귀었어」말하면 그제서야 흥미있게 듣곤 했다. 우리가? 왜? 누가 고백해서?



"몰라."

"사귄건 어떻게 알아?"

"분위기?"

"뭐야, 그게..."



둘 사이는 영 애매했다. 스구루는 사토루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 말도 안했다. 되려 모르는 척 굴었는데, 그럴싸한 분위기가 되면 갑자기 옷매무새나 자세를 지적한다던지 말을 돌렸다. 



사토루는 태생을 오냐오냐 도련님으로 자라 무슨 말을 하는 데 부끄러워하질 않았다. 툭하면 「너니까」, 「너는 특별하니까」, 「너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ㅡ등등의 신뢰 가득한 말. 네가 있으니까 괜찮아. 사토루는 늘「스구루가 있으니까」최강이라고 말했다. 사토루 혼자서는 안 되는 것처럼. 



그 말들은 스구루를 자만하게 만든다. 같은 최강 카테고리에서도 좀 더 우위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앳되고, 철없고, 가볍고, 가끔 실수도 하는 사토루.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태평한 말 뒤에 늘 따라오는 「너도 있는데 뭘」한마디. 사토루는 퍼즐 하나가 없는 사람처럼 굴었고 스구루가 딱 그 퍼즐인 것 마냥 대했다. 불완전한 사람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꼭 필요한 조각처럼.



부러 연심을 모르는 척 한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쑥쓰러우니까, 가 제일 크다. 다음으론 아는 체 해도 의미가 없으니까. 



어릴 때부터 주령을 보고 산 그는 일반인의 사고를 가질 수 없었다. 시각부터 다르니 생각하는 차원도 달랐다. 다들 따분한 인생을 사랑에 팔 때 그는 작은 의미에 매달렸다. 중학생 시절, 옆 자리 스기모토가 건강해진 건 세가와가 고백해서가 아니라 스구루가 주령을 없애준 탓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둘이 상사병이었네 사랑의 힘이네 이상한 소리들을 해대도 그는 물론 티내지 않았다. 



연애니 사랑이니 대부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영원하지 않다면 시간 낭비고, 스구루는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누굴 그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었고 고전에 입학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사토루와 같이 있으면 즐거웠다. 어느 새 함께인 게 혼자있는 것보다 익숙해진다. 자연스레 한참 후 미래를 약속하기도 했다.어른이 되면 어딜 가자던지, 주술사가 되면 뭘 하자던지.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단연 좋아한다 답할 수 있다. 그러나 무슨 의미냐고 물으면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사토루에겐 1부터 100까지 모두를 아는 것처럼 굴었으나 그도 동갑의 애였고 배우는 성장기였다. 틀에 박힌 정론이나 얼핏 듣기에 도덕적인 가르침은 뱉을 수 있어도 사랑은 다른 문제였다. 사랑은 누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었으니. 착하다 나쁘다 등의 선악처럼 정해진 것도 없었다. 중딩 시절 문과였던 스구루는 법, 정치, 사회, 영어나 맞춤법은 알았어도 로맨틱엔 약했다.



사토루의 애정은 스기모토와 세가와를 떠올리게도 했고 옆 집 강아지같기도 했다. 가끔은 영 밉살맞게 구는 게 표현할 줄 모르는 괴팍한 할아버지같다. 좋아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수줍어한다던지 귀엽고 풋풋한 반응 하나 없었다. 맹목적으로 신뢰하면서도 툴툴거리며 반항했다. 그러면서도 때때론 세상에서 너만 특별하다는 듯 낭만적으로 군다.



자기 감정도 모르는 스구루는 사토루의 사랑이 무슨 의미인지 영 알 수 없었다. 그러니 그는 모르는 척 한다. 말로 정확히 표현하지 않는다면 쭉 이대로니까. 길을 걸을 때 손가락을 잡아 와도 의도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둘이서 최강, 그거면 충분했다. 둘 사이에 다른 정의는 필요없었다.



그러나 2006년 초여름, 스구루는 꿈을 꿨다.



꿈 속의 그는 28살의 생일을 맞은 참이었다. 케이크 위 촛불들은 깨어나 세수를 할 때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다만 으레 모든 꿈이 다 그렇듯 깨고 나선 흐려지기 마련이었다. 책상 앞에 앉을 무렵엔 기억에 남는 건 어렴풋했다.



쇼코도 사토루도 이제 스구루의 꿈에 별 관심이 없었다. 스구루도 매 번 말하는 건 아니었다. 특이한 일이 있을 때- 꿈에서 유부남이 됐다던지, 졸업하고 둘이서 여행을 가다가 무인도에 쳐박힌다던지. 얘기할 때 재밌을 만한 거. 재미 없는 꿈- 뭐, 영화를 봤다던가 카페를 갔다던가- 그런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 번 꿈엔 사토루가 나왔지만 재미는 없었다.



그래서 스구루는 말하지 않는다. 흐려질거면 다 잊히면 좋을 것을 한 장면만 유독 끈덕졌다. 꿈 얘기를 하도 하니 언제는 사토루가 귀찮아했다. "꿈은 별 거 아냐. 컨디션에도 좌우되고, 호르몬이나 뇌파 활동의 결과물일 뿐이지 쌩 허구야. 술식에 걸린 거나 주구에 의한 게 아니면 해석해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그냥 영화 한 편 본 거랑 다름이 없어. 그러니까, 꿈 얘기 그만해. 지겨워."



(그 다음에 사귀는 꿈 꿨다 했을 땐 갑자기 돌변해선 꿈은 숨겨왔던 감정을 보여주는 거래, 무의식이래- 줄줄 열변을 토했지만.)



그 땐 짜증났지만 지금은 그 말이 고맙다. 별 거 아냐, 컨디션이 안 좋았나 보지. 하지만 불안함과 초조함은 계속 남았다. 그래도 스구루는 상담을 해 줬으면 했지 받을 남자는 아니었다. 



"사토루."

"왜?"

"난 사람은...특히 주술사는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 결과, 이 따위 수수께끼의 말이 탄생했다. 사토루는 콜라를 마시다 뭔 쌩뚱맞은 소리를 하냐는 듯 바라봤다. 



"...갑자기?"

"그낭 든 생각이야."

"평생? 한 사람만?"



말도 안 된다는 듯한 어조에 초조함은 더 커졌다. 스구루는 단호하게 끄덕였다. 응, 평생 한 사람만.



"여러 명 만나는 건... 여러 사람의 시간을 빼앗는 짓이잖아. 시간도 마음도. 인생의 끝까지 같이 갈 사람 딱 한 명만 정해두는 게 좋지. 연애는 이 사람들이랑 하고 결혼은 저 사람이랑 하면, 아깝잖아. 여러가지로- 좋지 않은 거 같아. 아니, 안 좋아. 연애도 결혼도 딱 한 명, 평생 원 앤 온리, 이게 좋다."

"...또 꿈 꿨어?"

"그냥 든 생각이라니까."



사토루는 남은 콜라를 찰랑찰랑 흔들었다. 짧은 침묵 후 무덤덤한 대답 : "불가능하지 않아?"



"...음?"

"아니. 평-생이라니. 100세 시대에, 불가능해, 그런 거. 애초에 결혼이라던지 필수도 아니고, 감정은 마음대로 안 되잖아. 사랑하겠다고 마음 먹어도, 마음처럼 안 될 수도 있고.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앞 일 같은거. 특히 주술사는 더."

"...흐음."



대부분의 경우 사토루는 스구루가 말 하는 걸 들었다. 임무라고 해도 너무 과하게 굴지 말기, 다른 사람에게 대놓고 같잖다고 하지 말기, 선생님한텐 예의바르게 굴기. 선생님이 혼낼 때 무하한 키지 말기. 



"그리고 난 사랑이 시간도 마음도 뺏는 거라곤 생각 안 해. 헤어지면 의미 없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인생에 의미가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즐거우면 땡 아냐?"



반면 계속 말해도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주술사는 비주술사를 지키기 위해 있다」, 아무리 말해도 지겹다는 듯 눈만 위로 까고 듣지도 않았다. 포지션 토크같은 거, 지겹다고.



"...그래, 그렇구나."

"꿈에서 누구한테 차였어?"

"응, 너."

"그르니까, 꿈 같은거 그냥 다-..."



사토루는 그대로 멈춰선, 나? 되물었다. 스구루는 다시 대답해준다. 응, 너.



"..."

"아주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더라고. 뭐라더라- 누구를 사랑한다면서."

"...스구루,"

"왜?"

"역몽이라는 말 알아?"



또 갑작스레 태도가 돌변해선, 사토루는 꿈은 현실과 반대라느니 사실과 다르다느니 지껄여댔다. 앞서 말한 자기 의견을 전면 부정하며 「평생 사랑, 다른 사람에겐 불가능하겠지만 나라면 가능」,「내가 스구루를 떠날 리가 없다」외치기 바쁘다. 거의 고백이었지만 급하게 말하는 사토루도 맹하게 흘려듣던 스구루도 둘 다 눈치 채지 못했다. 



뒤에 덧붙인대도, 사토루의 말은 뇌리에 박혔다. 불가능하지 않아? 그 말은, 꿈에서 본 뒷모습 옆에 나란히 남았다. 



그 날 이후로 더 꿈을 꾸는 일은 없었다.





*





굳건한 자만심마저 흐트러진 건 아마나이가 죽었을 때다. 우리는 최강이니 뭐니. 「내 실수야. 넌 잘못한 거 없어.」그 때 아마나이 옆에 있던 건 스구루였다. 스구루 뿐이었다. 그 땐 충격에 넘어갔으나 샤워기 밑에 서 있자면 위화감이 몸을 감쌌다.



네가 있으니까.

너도 있으니까.

너랑 나 둘이니까.



잘 한 일은 「스구루가 있어서」, 못 한 일은 「사토루가 실수해서」. 



"..."



아직 엉성한, 아직 완벽하진 않은 사토루를 보완해주는 건 나. 강한 사토루 옆에 설 건 똑같이 강한 나 뿐이다. 강함x강함=최강, 그러니까 둘이서 최강. 사토루가 브이하던 모습이 눈 앞에 스쳐지나갔다. 예전이라면 웃고 지나갈 추억도 지금은 의구심이 든다.



"이제 그 사람 한 명이면 충분하지 않나요?..."



1년 후배, 하나 뿐이던 동급생을 잃은 나나미. 사토루는 나나미 대신 하이바라의 복수-마무리를 하러 갔고, 스구루는 시체에 천이나 덮어 주고 있다. 사토루가 심어준 자만심은 금방 깨졌다. 



강함x강함=최강이랬지만,

최강x1도 최강이잖아.



사토루는 원래 최강이고, 스구루는 1 뿐인 사람. 마이너스도 0도 아닌, 그냥 그 정도의 사람이던게 아닐까. 그나마 1이라서 최강처럼 보인, 한 명만 남는다면 최강은 아닐. 혼자라도 최강인 사토루와 다르게.



아마나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텐겐 님과 동화되는 일에 주저함이 없던 애를 설득한 건 스구루였다. 차라리 미적거리지 않았다면 좋았을 걸. 말대로 텐겐으로 다시 태어나기라도 했을텐데. 굳이, 구태여, 그 젊은 청춘이 아까워 보여서.



1짜리가 준 어줍잖은 동정심에 신의 일부도 못 되고 그냥 죽어버린 중학생. 스구루는 청춘의 죽음에 복수도 하지 못 했다.간간히 떠오르는 건 시체를 둘러싸고 박수치던 사람들과,



「괜찮아, 우린 최강이니까.」



아마나이의 마지막 모습. 그래, 뭐가 최강인가. 아무 것도 못하고 쓰러졌는데, 그 것도 주술사도 아닌 사람에게.



「약자 생존...」



헛된 자만심 때문이다. 최강이 인정해주니 정말 최강이 된 듯한 기분에 오만하게 굴었다. 우린 최강씩이나 되니까 약자를 굽어 살펴야 해. 자비를 내리는 것처럼. 우타히메를 내려다 봤을 때 마냥 높은 절벽 위에 서서 한 마디. 약자를 괴롭히는 건 좋지 않아.



과연 누가 약자였나. 주술사는 누굴 위해 있는가? 주술사의 의미는 누굴 위한 건가? 우월감은 사라지고 우월했던 기억만이 남았다. 최강의 옆자리에서 최강의 기분을 느꼈던 스구루는 약자가 될 수 없었다.



언젠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사토루한테 차이는 꿈을 꿨댔더니, 그딴 거 역몽이라고. 정반대라고. 그래, 정말 반대구나. 내가 널 떠날 거니까. 사토루 말이 맞다. 앞 일 따위 어떻게 될 지 모른다.







1







"이 거 봤어?"

"아니."



그 날 스구루가 보여준 영화는 매트릭스였다. 진실을 알 수 있는 빨간 약, 이 전대로 살 수 있다는 파란 약. 스구루는 재밌는 영화들을 많이 알았다. 주로 옛날 영화들. 어느 쪽이냐 하면, 사토루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공포 영화는 현실성없고 로맨스는 급전개가 많다. 감정선도 이해 안 가고, 왜 명작이라는지 모르겠고.



그래도 권유를 거절하지 않은 건 스구루와 함께 보는 시간이 좋았던 탓이다. 하나 둘 볼 수록 점점 몰입도 됐다. 영화 속 캐릭터가 죽으면 과장이지만 우는 척 할 정도까진 발전했다. 



범죄물, 전쟁 다큐멘터리, 재난 영화, 괴물 영화, 상어 영화. -너 상어 본 적 있어? 사토루는 물에 빠지지도 않겠다... -시시한 망상들, 너라면 어쩔 거냐는 질문. 



그래봤자 다 가짜인데. 허구, 허상. 주술사에겐 의미가 중요하다던 스구루는 의미 따윈 개나 준 영화를 보고 의미없는 질문을 한다. 러닝 타임 1시간 40분이 지나면 간식 치우고 양치하고 자기. 영화 이야기, 간식 이야기. 내일 수업 이야기.



"사토루라면 빨간 약이랑 파란 약 중에 어느 쪽 먹을 거야?"

"우웩- 망상 토크."

"...뭐야,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재미 없어- 그런 얘기. 두뇌 에너지만 쓰고. 피곤해~"

"자기 전에 밖에서 얘기 한 번 할까?"







1-1







종종 꿈을 꾼다. 과거에 관한 꿈. 꿈은 흐려진다지만 사토루에겐 예외였다. 깨고 나서도 모조리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게 그의 꿈은 내용이 변하지 않았다. 스구루를 죽이고 몇 개월, 새 학생 세 명을 받은 뒤에도 여전히 과거는 꿈 안에서 생생했다.



꿈이면 꿈 답게 허상을 보여줘야는데 이제껏 사토루의 꿈은 회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일. 가끔은 1학년 첫만남부터, 대부분은 2학년 여름부터 시작돼선, 신주쿠의 뒷모습으로 끝나는.

일어나면 씁쓸하다. 아련도 했다. 그래도 다른 꿈을 보고싶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꿈이 꿈다워진 건 2018년 여름부터였다.



나이는 뒤죽박죽으로 어느 날은 졸업식 중이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다 같이 모여 첫 회식을 했다. 모두 성인이 된 기념으로 건배- 따위의 시시한 건배사. 모인 사람은 메이메이, 우타히메, 나나미, 하이바라, 쇼코, 사토루, 스구루. 있을 리 없는 사람들이 여럿.



꿈 속의 스구루는 사람을 주살하지 않았다. 고전에서 퇴출되지 않고, 주저사도 되지 않은 그는 그저 정론을 외치는 최강 그대로였다. 사토루는 교사가 아니었고 붕대도 안대도 아닌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내용은 매 번 이어지는 듯 했다. 어제 꿈에서 스구루와 카페를 가면, 오늘 꿈에서 기억하고 있었다. 꿈마다 날짜는 달라도, 아- 저번에 갔던 곳? 작년에 갔던 데? 네 생일에 갔던 곳. 



회상에서 허상으로 바뀌자 곧 기상과 함께 꿈은 흐려진다. 어렴풋이 즐거운 꿈을 꿨다는 느낌만이 남았다. 씁쓸아련에 익숙한 사토루는 그게 못내 불쾌했다. 둥실둥실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고 다시 침대로 뛰어들면, 이-삼 일에 한 번 꼴로 꿈을 꿨다.



바뀐 이후로 꿈을 꾼다고 하면 모두 그 이상한 것 뿐이었다. 눈을 뜨면 잊는 기억은 눈을 감으면 다시 떠올라, 어제 꿈에선 몇 살이었고 뭘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스구루는 주저사가 되지 않아도 가족을 만들었다. 진짜 가족을 죽인 것도 아닌데 새 가족들을 또 만들어댄다. 



"너 욕심쟁이야."



언제, 어릴 때는 인생의 끝까지 갈 딱 한 사람만 만드는 게 베스트네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만. 툴툴거리자 스구루는 "별로 결혼한 건 아니니까 관계 없잖아." 그런다. 어릴 땐 몰랐지, 연애니 결혼이니- 사랑이 아니어도 인생의 동반자는 많다는 걸.



"원 앤 온리가 제일 좋댔잖아."

"마음 먹은 대로 안 된다고 한 건 사토루고."



꿈은 꿈이면서 꿈같질 않다. 스구루는 옛날의 대화를 다 기억했다. 어딘가 다른 세상에 똑 들어온 것처럼. 주저사가 안 된, 퇴출되지 않은, 어린 그대로 자란 스구루가 있는 세상처럼. 



사토루는 주저사가 되지 않은 스구루 따윈 모르는데. 무의식의 바람인가, 그냥 역몽인가.



꾸면 꿀수록 일어날 때 즐거운 기분은 점점 강해졌다. 하루 종일 텐션 업,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에도 텐션 업이니까. 너무 즐거워서, 언젠가부턴 베개에서 머리를 떼고 싶지 않아졌다. 다시 눈을 감고 싶어졌다.



이동하는 차에서, 학생들을 기다리는 시간에, 하여간 짬이 있다면 눈부터 붙이고 봤다. 역시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안대에 가려졌으니까. 그도 아니면 「고죠 씨는 피곤할 만 하지」멋대로 생각해 주니까.



또 어느 날은 꿈을 꾸자 반지를 들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것도 안 꿇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눈 앞엔 스구루가 맹한 얼굴로 있다. 눈 한 번 깜빡이면 저번 꿈의 기억이 밀려들어온다.



여행을 가자 했던가. 17살에 양아빠가 된 스구루는 한 해 한 해 갈수록 가족이 한 명씩 은근 슬쩍 늘어났다. 24살 무렵엔 별 이상한 놈이 「어머나♡ 잘생긴 남자♡」하며 기어들어왔다. 가족이 늘자 자연스레 스구루는 사토루에게 관심을 덜 줬다. 



"굿루킹가이인 나보다 저!! 이상한!! 가슴에 하트붙인 놈이 좋다고?!"

"...사토루, 실례야."

"나는 가족 안 시켜줬잖아!"

"사토루는 부모님 다 계시잖아."

"쟤는 성인인데 왜 네가 아빠 노릇을 해야되냐고?!"

"아빠 노릇이라기보단 형 노릇이지."



깽판 쳤던 날도 떠오른다. 존재할리 없는 기억들은 꿈 밖 현실보다 또렷했다. 서운함에 지친 사토루는 잠든 스구루를 들쳐메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스구루가 일어났을 땐 하늘 위였다. 그것도 떨어지는 중의.



비행기는 비실비실 바다에 다이빙했다. 무하한 킨 사토루와 주령 부리는 스구루만 무인도에 철썩 갇혔다. 상어 영화 떠오르네, 한 마디 했다가 얻어맞았다. 



돌아갈라면야 돌아갈 수 있었을텐데 꿈 속의 둘은 무인도에서 살림을 차렸다. 모닥불 피고 섬 안에 흐르는 계곡 물고기 잡아 먹고, 스구루의 주령 안에 누워서 하늘에 별들을 봤다. 무드도 뭣도 없는 침 투성이 주령 입 안에서, 스구루가 그랬다. 나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거 같아.



"뭐를?"

"옛날엔 확신이 없었거든."

"근데?"

"지금은 생겼어."

"뭔데?"

"사토루, 나 좋아하지?"



사토루는 주령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과 얌전히 끄덕이고 싶은 마음 중 갈등했다. 스구루는 고민하는 사토루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밤 하늘의 별, 달. 쟤네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빛도 아닌데 그 날따라 랜턴보다 환했다. 주령 이빨에 똑 맺힌 침방울이 그 순간엔 처마에 맺힌 빗 방울이 됐다.



"나도 사토루를 좋아해... 아마, 같은 의미로."



그래, 오늘의 꿈은 그로부터 아마 몇 개월 뒤의, 25살 초인 듯하다. 0.2초만에 상황을 파악한 사토루는 무릎을 마저 꿇으면서 반지를 내밀었다. 틀에 박힌 프로포즈, 정론을 좋아하는 스구루에겐 딱 아닌가.



"나도 가족 시켜 줘."



형도 아빠도 동생도 강아지도 말고 딴 거. 스구루는 곤란한 듯이 웃으면서 말한다. 프로포즈 할 때정돈 멋지게 말 해야지... 사토루는 대답 없이 내민 왼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일어섰다.



일어난 사토루는 28살의 독신 그대로였다.







1-2







꿈 속에서 결혼한 이후로 사토루의 잠은 더 늘었다. 누가 봐도 눈치챌 만큼. 몸을 움직이는 건 그나마의 책임감. 수업을 마치고, 임무까지 후다닥 해치우고나면 무하한 키고 길바닥에서 슬립. 정신이 있으면 순간 이동, 옷도 안 갈아입고 뻗기. 



잠을 자면 행복하다는 공식은 반전술식이 뺑뺑 도는 신선한 뇌에도 각인이 됐다. 지치는 일이 생기면 보상 심리로 더 졸음이 밀려 왔다. 그래 봐야 남들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을 못 채웠지만 사토루와 사토루를 아는 사람들에겐 놀라운 일이다. 이동하는 시간, 체력조차 아끼고 잠에 매료됐다. 



꿈에 돌입하고 0.2초 뒤엔 전의 꿈들이 기록처럼 뇌에 새겨진다. 꿈 속에선 현실을 잊어버렸다. 현실에선 꿈을 잊어버린다.



행복한 가상 세계, 암울한 현실 세계. 주인공은 어느 쪽을 골랐더라. 그 날 결국 티격태격대느라 스구루에겐 못 물어 봤다. 그 땐 물어 볼 생각도 없었겠지만...



프로포즈도 이어진다. 27살의 크리스마스 이브, 작년에 결혼해서 정식으로 가족이 된 사토루는 스구루 집에 굴러들어갔다. 스구루의 가족은 또 늘어났지만 더 이상 신경쓰이진 않았다. 주변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사토루의 원앤온리, 평생 함께 할 딱 한 사람은 스구루 뿐이었으니까.



앞에선 틱틱대고 싫어하는 척 해도 사토루는 스구루한테 물렀다. 스구루의 말은 모두 듣는다. 사토루가 퍼즐이라면 스구루는 퍼즐을 맞춰 주는 사람같았다. 僕로 바꾸고, 약자를 지키려고 산다. 주술계를 바꾸려고...



"..."



생각하다 사토루는 고개를 털었다. 사토루도 스구루도 교사가 아니었다. 결혼하고 일본을 떠났으니 외국 살이한지 일 년 반이 좀 넘었구나. 미미코, 나나코, 몇 명은 일본에 남았다. 학교나 직장 같은 이유로. 



그래, 가족이라고 모든 순간을 함께하진 않는다. 그래서 사토루는 몇 명이 늘어도 괜찮았다. 스구루가 죽는다면, 죽는 순간에 딱 한명이 같이 있어야 한다면 그 자리는 단연 사토루 꺼였으니.



창 밖으로 해가 져 가는게 보였다. 커텐을 안 쳐도 불만 끄면 적당히 어둑했다. 아직 남아있는 노을, 케이크 위의 촛불 하나. 샴페인. 12시가 될 때 먹자고 했지만 사토루가 졸랐다. 



"불 킬까?"

"아니. 아직."



샴페인은 노을 빛 때문에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모르게 됐다. 하나 둘 셋, 메리 크리스마스...







1-3







이 건 내 지론인데, 사랑은 가장 왜곡된 저주야...







2







꿈이 갖는 의미는 별 게 없다. 컨디션에도 좌우되고, 호르몬이나 뇌파 활동의 결과물일 뿐,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 술식에 걸린 거나 주구에 의한 게 아니면 해석해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그냥저냥한 영화랑 다름 없다.



"고죠, 저주라도 걸린 사람 같구나."

"아마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영화 안에서 살 수 있다면 어떨까. 현실도 잊고, 감각도 생생하고, 인셉션이나 파프리카처럼 허황된 것도 아니라면. 그냥 다른 현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되려 깨어 있는 지금이 꿈인 게 아닐까?



기억이 공유되지 않음에도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들쭉날쭉 맘대로 이동하던 날짜는 점점 하루 이틀 단위로 세밀해졌다. 크리스마스 이브 이후, 1월 1일 종소리를 함께 들었다. 1월 7일 쯤에는 가족 구성원 둘이 비행기 타고 날아왔다. 



그 쯤 현실은 가을이 넘어갔다. 10월 31일, 최악의 형태로 친구(의 시체)와 재회하고 비좁은 원룸통에 갇힌 고죠는 할 게 없어서 또 잠을 잤다. 꿈 속의 날짜는 어느덧 2월 3일,



스구루의 28살 생일. 케이크랑 초를 산 건 사토루였다. 굳이굳이 나이를 눈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초를 낱개 단위로 받아온 탓에 케이크가 꽉 찼다. 불을 붙이자 장난 아니게 타올라서, 평생 잊지 못할 거 같았다. 불 나는 거 아니냐고 한 바탕 웃었다. 



"이거 어떻게 끌 거야?"

"모르겠어. 어떻게 끄지?"



머리가 다 탈까 봐 사토루는 머리카락을 귀에 걸어줬다. 문득 본 머리카락은 길다. 촛불은 너무너무 활활 타서 불을 킨 것보다 스구루 얼굴이 잘 보였다.



"...."



순간 사토루는 현실을 떠올려냈다. 28살의 스구루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 뿐인가? 27살의 봄부터 초겨울까지, 26살도, 25살도, 24살도,23살도22살도21살도20살도19살도18살도,심지어 그렇게 나가버린 17살의 늦가을과 초겨울이 어땠는지도 사토루는 모른다.



"사토루?"



눈을 뜨면 옥문강 안이겠지. 그런 기분이 든다. 지금 나가면 영영 다시는 이 꿈 속으로 못 들어 올 거라는. 



영화 주인공은 어떤 이유 때문에 빨간 약을 먹었을까? 세상의 진실을 알게 해준다는 멋들어진 말 때문일지도 모르지. 사토루는 주인공이나 혹은 주저사가 된 스구루처럼, 대의니 정의니 뭐니 따위를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난 사람은...특히 주술사는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



꿈 속의 스구루는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다른 세상의 스구루는 같은 사람이라고 칠 수 있을까? 과거의 스구루는, 돌아가서 과거를 바꾼대도, 과연 그 둘을 같은 사람이라고 여겨도 되는 걸까?



"있잖아."

"응."

"평생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응."

"나,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사토루는 쭉 알고 있었다. 스구루가 사토루의 감정을 알고 있단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다는 걸. 그는 죽는 한까지 말할 생각이 없었다. 스구루는 딱 봐도 사랑을 모르는 것 같았고 사토루는 어떤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이과에 가까운 사토루는 수학도 과학도 사랑의 낭만 또한 잘 알았다. 누가 알려줘서 깨닫는 게 아니라면 스스로 알 때 까지 놔둘 심산이었다.



같은 영혼, 같은 몸, 같은 사람이란들 느껴지기엔 다르다. 사람의 사고에는 환경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사고에 따라 행동도 말투도 전부 달라진다. 



사토루는 스구루의 모르는 10년까지도 사랑했다. 신주쿠에서 떠나는 뒷모습마저 진짜 미워하진 못했다.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 생각하면 좋을텐데, 사토루는 짧은 새 씁쓸함과 아련함에 너무 익숙해졌다. 



눈 앞의 사람은 현실보다 배로 사랑스럽다. 사람을 원숭이 취급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았고, 진심으로 웃고 사는. 그러나 사토루가 사랑한 건 주저사였다. 매정하게 떠나, 10년간 숨어지내다, 갑자기 고전에 똑 나타난 들쭉 날쭉의, 속을 모르겠고, 미쳐버린, 결국 마지막엔 친히 지옥으로 보내준 사람. 24살에라도 사랑을 깨우친 꿈 속과 다르게 끝까지 모르고 죽어버린 녀석. 



꿈은 만약을 보여준다. 만약 아마나이 임무를 맡지 않았다면, 만약 하이바라가 죽지 않았다면, 만약 사토루가 혼자 반전 술식을 깨우치지 못했다면, 스구루가 사람을 주살하지 않았다면, 떠나지 않았다면, 여름이 많이 덥지 않았다면...



그러나 사토루는 「만약에」라는 가정이 의미없다고 생각했다. 의미없는 일은 생각해도 필요 없었다. 스구루가 그랬으니까. 주술사에겐 의미가 중요하다고. 사토루는 스구루 말이라면 디지게 잘 듣는 사람이었다.



「연애도 결혼도 딱 한 명, 평생 원 앤 온리, 이게 좋다」



사토루는 꿈 속 사토루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반지를 뺐다. 케이크 위 촛불은 활활 타올랐다. 반지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는 28살의 생일을 맞이한 모르는 사람을 뒤로 하고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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