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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꿈은 간다맨이었다. 방송 타임이 황금 시간대와 겹쳐 방학이면 할머니가 드라마도 포기하고 같이 간다맨을 봐 준 기억이 난다. 정의도 선의도 모두 가진 용사 간다맨. 오프닝을 따라부르면 할머니는 박수를 쳐 주셨다.
아동 매체에도 사랑은 나온다. 멋져요 간다맨, 지지 말아요 간다맨! 옆에서 응원해주는 사람, 동료. 자주 납치 당하는 히로인. 부끄럽지만 6살 칸타로의 첫 사랑이기도 했다. 그 히로인을 사랑했는지, 그 사랑을 사랑했는지는 다소 헷갈려도.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고, 거기에서 발전하는 사랑은 어린 칸타로가 보기엔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악을 물리치고, 사랑하는 사람도 지키고, 종국에는 싸웠던 적도 개심시켜 친구로 만드는 간다맨. 허무맹랑하고 현실성 없는 스토리지만 애들 프로가 그럼 그렇지 뭐.
그러나 그렇기에 주는 감동이 있었다. 우중충한 사회는 주지 못할 판타지. 희망도 얻곤 한다. 간다맨은 아이들한테 교훈을 주는 프로니까.
어른이 된 칸타로는 종종 옛 꿈을 추억하며 간다맨을 보곤 했다. 이미 수십 번은 넘게 본 에피소드도 늘 볼 때마다 똑같은 벅참을 선사했다. 야근 후 돌아 와 후줄근한 런닝따위로 갈아입고 나면 칸타로는 맥주를 손에 든 채 티비에 몰입했다. 순수한 어린 시절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서.
화면 속 히어로는 언제나 바쁘게 정의를 실천한다. 악이 등장했다가 쳐맞고 사라지는 스토리는 매 화 똑같았어도 여전히 꿈을 쥐어 줬다. 간다맨이 되고 싶다. 아이 때 이후로 입에 낸 적 없는 말은 그래도 여전히 칸타로의 마음 속엔 존재했다. 히어로가 되고 싶다.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보고 싶다.
문득 테이블을 보니 먹다 만 오징어가 봉지 채 널부러져 있다. 맥주캔을 흔들어 본다. 다 비어 가벼워진 캔이 아쉽다. 불 꺼진 방 안에서 술과 함께 쭈그려 앉은 20대 남성은 히어로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칸타로도 그런 건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간다맨이 어떻게 된단 말인가. 세계의 주인공 역할은 일본 작은 마을에 쳐박혀있는 파출소 순경이 맡기엔 너무 크다. 거기다 이 나이 먹고 간다맨을 동경한다고 하면 비웃음만 살 거였다.
"가라~ 가라.. 간다맨... "
어른이 된 사회인은 구석에서 노래나 흥얼거리는 걸로 만족했다. 기껏해야 간다맨 짝퉁 만화를 연습장에 끼적여보는 게 다였다. 주인공이 못 된다면 상상이라도 해 보고 싶었으니. 순경을 때려 치면 나중엔 만화가나 되어 볼까, 그 정도의 마음으로.
아아, 간다맨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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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찔리고 나서도 간다맨을 봤다. 6인실로 옮긴 후 옆자리에 있던 꼬마가 푹 빠졌기 때문이다. 칸타로는 처음엔 요즘도 간다맨을 아는 건가?, 싶었으나 채널 구석 로고를 보고 납득했다. 울트라 슈퍼 간다맨 V 12+. 덕지덕지 상용구를 붙였어도 간다맨은 간다맨이었다. 악을 쓰러트리고, 세계를 구하는 요란스러운 주인공. 지쳐도 자쳐도 굴하지 않는 멋쟁이.
「 널 잡는 건 나야! 」
흘러나오는 엔딩곡은 어색한 음이었지만 칸타로는 알 수 없는 고양감에 차 올랐다. 한 장면 한 장면 추임새를 넣던 옆자리 애 때문인지 이유는 몰라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가 여태껏 간다맨이 되지 못한 이유는 딱 하나 뿐이었다. 세계를 위협하는 악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성도 하지 않고 나쁜 짓만 일삼는 말 그대로 악 중의 악. 사실 그딴 건 흡혈귀가 돌아다니는 세상에서도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다. 살아 보니 세상의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다. 완벽한 악이라는 게 정말 있던가. 지능이 없는 하급들조차 생존 본능이라는 이유가 있다. 사람을 해치는 걸 좋아하는 싸이코는 대부분 진즉 헌터들에게 잡혀 들어간 상태였다. 일개 순경이 악과 대치해도 할 수 있는 건 지원 요청 뿐이었다. 그 이상은 순경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위험하니까.
살인마 나기리.
어쩌면 간다맨을 포기하지 못한 탓이었나. 무의식 어딘가에서 칸타로는 기다리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생의 커다란 이벤트.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는 게 칸타로를 자극했다. 「나」만이 발견한 흉악범, 언제나처럼 지원 요청도 할 수 있었겠지만 칸타로는 그러지 않았다. 겉으로는 핑계였다. 그러다 도망갈까봐.
나기리라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홀홀단신으로 권총 하나 챙겨 체포하려던 건 누가 봐도 무모한 행위였다. 아무도 못 잡았던 흡혈귀. 아무도 못 잡았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건데 칸타로는 그 순간 '내가 체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휩싸여 있었다. 결과는 완전 참패였지만.
방금 본 간다맨이 엔딩곡이 머리에 내내 울린다. 머리에 총 세 방를 맞고도 낄낄 웃던 그 건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상적인 악이었다. 웃음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배의 상처가 쑤셨다. 분하다. 체포하고 싶다! 나기리에게 농락당했을 뿐이었지만 그 날의 기억은 영 모호했다. 놓친 게 분하다. 조금만 더 강했어도 잡을 수 있었을텐데.
아무도 못 잡았던 악을 잡아 넣고 갱생시키고 싶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기리는 순경의 인생에 있어 첫 악인이었다.
1-1
그래도 역시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세상을 돌며 수행을 하고 되돌아온 칸타로는 아무도 그 흉악한 적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런 것도 있었나?」혹은 「그랬던 것 같기도.」. 잘 시간을 짬 내면서 틈틈히 돌린 전단지는 대부분 받아주지조차 않았다. 흡대 옷을 입고 있으면 몇 명은 유심하게 봐 주었다. 절반은 허황된 설명에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갔어도. 흡대로 민원이 들어온 적도 많았다. 칸타로는 꾸중을 들으면서도 순찰시간을 이용해 전단지를 돌렸다. 무시받는 것보단 민원이 들어오는 게 낫다.
살인마 나기리를 아시는 지요? ㅡ거리에서 나믿맨이라고 불릴 때까지 칸타로는 꾸준히 전단지를 만들었다. 이거 진지하게 하는 거냐고 물어보는 학생도 있었다. 칸타로는 열과 성을 다해 대답했으나 비웃음을 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억울한 마음마저 든다.왜 아무도 몰라준단 말인가.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온 몸에 칼날이 나온 그 모습은 있어서는 안 될 흉악한 범죄자 그 자체였다. 수행을 하면서 매일 밤 다른 사람에게 체포되진 않았을지, 사람을 많이 해치고 다니는 건 아닌지 걱정한 게 무색하도록 마을은 평화롭다.
평화로운 건 좋을 텐데 칸타로는 기분이 나빴다. 그 날 느낀 공포와 불안은 이제 누구도 공감해주지 않았다. 살인마 나기리는 세계의 적이어야 하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칸타로는 생각을 비웠다. 이게 아닌데. 이럴리가 없는데? 울렁거리는 불쾌함도 홀로 나기리 수색을 하고 있으면 잊어버릴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강박에 시달린다. 나만은 잊으면 안 된다는 오기가 생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잊어버렸다면 나기리가 무슨 수를 쓴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칸타로는 악을 쫓는 주인공으로 남을 수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칸타로의 자기소개는 잘 들어주다가도 나기리의 설명을 시작하면 자리를 떴다. 그도 아니면 명백히 듣기 싫단 얼굴로 몸을 비비꼬며 가고 싶단 표시를 하곤 했다.
흥미있는 얼굴로 들어준 건 츠지타가 처음이었다. 칸타로는 순간 너무 들떠 파일 드라이버까지 내보였다.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니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었다. 원래라면 시민의 이름 따위 묻지 않았을텐데 주절주절 설명을 하고 나니 뒤늦게 민망함이 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비슷한 남자를 본 적이 있어..."
그 때만 해도 츠지타는 칸타로에게 선량한 시민일 뿐이었다. 처음 이야기를 끝까지 관심있게 들어준 상대에 대한 호의는 상황 판단력을 둔하게 만들었다. 편견도 한 몫했다. 나기리같은 흉악한 악이 일부러 시시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을 거라는. 시민을 자칭하며 연기를 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머리에 권총을 세 방 맞고도 멀쩡히 움직이던 양반이.
그러므로 나온 결론 : 츠지타씨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하다니!
츠지타는 칸타로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수색에 함께 해줬다. 칸타로는 그 모든게 즐거웠다. 나기리를 아는 건 그 혼자 뿐이 아니라는 게 반갑다. 더불어 그의 영웅 행위에 함께해주는 동료가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
그 날부터 전단지를 돌리는 일은 줄었다. 비상용으로 상비하고 있는 몇 장도 그저 부적같은 느낌이다. 츠지타는 점점 칸타로에게 있어 소중해졌다. 꾸중만 듣던 직장에서 당당히 A급 폭탄마를 붙잡는다는 첫 공로를 세울 수 있게 된 것도 츠지타의 덕이었다. 나기리의 목격 증언이 없었다면 보트에 탈 생각도 하지 않았을테니.
수상한 방식으로 목숨을 구해졌어도 칸타로는 의심할 생각조차 없었다. 되려 츠지타랑 함께라면 뭐든지 해도 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매 번 혼자 튀어나간다고 혼만 났던 그에겐, 돌발 행동을 해도 지켜준 츠지타는 든든한 파트너가 됐다. 다시 잘 생각해보니 나기리는 혼자 잡기에 너무 벅차 보인다. 츠지타가 있어 줘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있어 줘야 한다.
신분이 시민이건 헌터 수행원이건 하등 그에겐 상관이 없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츠지타가 위험하면 칸타로가 전력으로 지켜줄 생각이었으니 아무 문제 없다고 판단했다. 손목을 잡고 달리면 언젠가는 나기리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즐겁다. 간다맨도 악을 잡으러 다니면서 즐거웠을까? 그건 좀 기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칸타로는 즐거웠다. 도시를 뛰는 게, 함께 달리는 게 즐겁다.
우리가 같이 잡는 겁니다. 칸타로는 속으로 말했다.「우리」라는 말의 울림이 좋다. 즐겁다, 즐겁다.
1-2
완전히 간다맨 모드에 이입한 칸타로는 한 가지 착각에 빠져 있었다. 칸타로가 나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저쪽도 그럴 거란 생각이다. 냉정히 바라봐보면 나기리에겐 널려있는 사람 중 하나였을텐데 칸타로는 그렇게 믿었다.
상상 속 나기리는 칸타로를 기억해준다. 약간 경계심까지 품어준다. 매일 자기 전 나기리가 튀어나오면 어떻게 조질지 망상하는 게 일과였다. 꿈에서까지 칸타로는 나기리에게 집착했다. 츠지타와 만난 이후로는 둘이서 나기리를 붙잡곤 했다. 원 투 칸타로 펀치. 이얍. 뿌듯하다.
그러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나기리가 없다던지, 다른 사람에게 이미 체포되었다던지. 악을 집어 넣는 것도, 혹은 악을 용서하는 것도 칸타로가 해야 했다. 나기리는 더 나쁜 새끼여야 한다. 더 무섭고, 더 흉악하고, 더....
1-3
츠지타는 용감하다. 부대장 히나이치도 존경하는 사람이었지만 칸타로는 츠지타가 좀 더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기리를 수색하러 가자고 손을 잡아 준 츠지타는 평생 잊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칸타로는 생각보다 한다의 말에 충격받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입시 점수가 잘 안 나와서 주저앉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 뿐이었다. 아ㅡ 어떡하지, 앞으로. 츠지타에게 찡얼거리고 다음날이면 싹 풀릴 것 같았는데, 그런 가벼운 생각이었는데.
「나기리 수색이다!」칸타로는 나기리의 뒤를 따르며 당황스러움이 컸다. 흔적이라는 뭘 봐도 나기리가 남긴 것 같지 않았고, 유능한 선배의 말은 귀에 깊게 남았다. 반면 츠지타는, 주변의 누가 뭐라 그러던간에 신경쓰지 않고 꿋꿋했다. 마침내 증거를 눈 앞에서 봤을 때, 칸타로는 「나기리가 왜 사마귀만 공격했을까」따위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담피르에게도 기척을 숨긴 나기리에 대한 공포보다도, 왜 섬멸해야하는 악의 대상이 자길 구해줬는지의 의문보다도,
"나기리가 있었어요!"
츠지타에 대한 존경이 더 컸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척척 해내는 츠지타씨,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 츠지타씨, 신념이 확고한 츠지타 씨.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칸타로 혼자 보지 못한 것들을 봐 준다.
"그러냐.."
그 날 칸타로는 평생 「츠지타 씨」없이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기리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2
츠지타가 납치됐다. 범인은 물론 5m 초대형 괴물 나기리다. 칸타로는 수갑이며 파일드라이버며 바리바리 싸들고 돌진한다. 붙잡힌 츠지타는 「오지마, 칸타로~!」흑흑 울며 가련하게 말한다. 칸타로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금방 구해 드리겠습니다!! , 그리고 파일 벙커 파이어. 원샷 원킬로 쓰러진 나기리의 손에서 츠지타를 구출해주면 그는 손을 마주 잡고 「구해줘서 고맙다..」따뜻한 감사를 전했다. 칸타로는 주먹을 꽉 쥐고,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겸손을 떨어 댄다. 「많이 무서웠죠?」 잡은 손을 풀고 껴안아 주면 츠지타도 몸에 힘을 빼고 기대 준다. 「칸타로...」그리고 칸타로의 턱을 잡고 위로 올려서ㅡ
"헉."
일어난 칸타로는 축축한 이불을 믿을 수 없었다.
2-1
세탁기 앞에서 칸타로는 고민에 휩싸였다. 이 나이 먹고 몽정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보단 꿈 내용이 더 놀라웠다.
"츠지타씨는 좀 더 멋진 사람인데..."
나기리한테 잡혀갔어도 진짜 츠지타라면 반항을 할 거다. 그러기 어려우면 칸타로에게 「멍하니 있지말고 날 구해!!」소리를 빡빡 지를 거였다. 연약하게 잡혀서 오지마,칸타로~ 잉잉 우는 짓거리는 하지 않을 사람이다. 저번 강도 삼인조 때만 해도 츠지타는 분한 얼굴을 할 뿐 도움을 청하진 않았다. 칸타로도 구해주지 못했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츠지타는 스스로 도망쳤다.
오전 11시, 세탁이 마쳐질 때까지 티비라도 보기로 한다. 커피 한 잔 들고 소파에 앉아 채널을 둘러 보니 딱히 볼 만한게 없다. 예능, 뉴스, 예능, 홈쇼핑 광고. 멍하니 리모콘을 누르던 그가 선택한 건 결국 또 간다맨이었다.
병실에서 본 것도 좋지만 역시 저화질의 CG티 낭낭한 옛날 쪽이 더 취향이었다. 가라 가라 간다맨~ 작열용사 간다맨... 흥얼거리는 소리는 세탁기와 티비 소리에 같이 섞였다. 뇌를 비우고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어느새 23분 중 15분이 지나 클라이막스였다.
"오지마, 간다맨~!"
"금방 구해줄게!!"
흑흑 우는 히로인, 어른이 되고 보면 정말 잦은 납치 횟수다. 칸타로도 이런 걸 꿈꿨다. 좋아하는 여자 멋있게 구해주기. 어릴 적부터 매체에서 이런 걸 보고 자랐으니 로망이 그렇게 된걸까. 쓸데없는 생각들은 하고 있자면 시간이 금방 흘렀다. 머그잔을 입에 대면 어느새 미지근해져있다.
"구해줘서 고마워..." 플레이타임이 흐를수록 칸타로는 기시감에 휩싸인다. "아니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는걸."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가 웅웅웅 더 크게 들린다.
"많이 무서웠지?"
"간다맨..."
티비 속 두 사람은 아동 프로 주제에 그럴듯한 키스를 했다. 흘러나오는 익숙한 엔딩 노래와, 세탁이 다 됐다는 알림음 속에서 칸타로는 머그잔을 들고 굳어 있었다.
2-2
마음을 깨달았어도 고백은 하지 못했다. 좀 더 멋진 시추에이션에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극적인 상황, 예를 들면 저번 수갑을 찼을 때처럼 죽을 뻔한 위기라던지. 아니면 사마귀 떼에 둘러싸였을 때처럼 적들에게 포위되어「살아 돌아가면 본 경관과 사귀어 주세요...!」같은 느낌으로...
나기리 잡기 망상은 츠지타에게 고백하는 망상으로 뒤바뀌었다. 5m 흉악범 나기리는 어느샌가 조미료 취급이었다. 나기리가 나타나서 위협하면, 이렇게 저렇게 해서ㅡ 그리고 멋지게 고백, 키스. 쨘.
"헤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랑은 더 커진다. 24시간 동안 붙어있고 싶다. 정신을 차려 보면 하루종일 츠지타를 떠올리고 있었다. 만나고 싶다. 빨리 또 만나고 싶다.
3
매체 속 멋진 히어로의 사랑은 어두움과 갈등 사이에서도 올곧게 빛났다. 간다맨은 늘 옳은 선택만을 한다. 고난이 있었어도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길을 택한다. 현명하고, 멋지고, 정의로운 간다맨.
나기리를 쫓으며 칸타로는 간다맨이 된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었다. 세계를 위협하는 흉악한 악을 쫓는 스릴. 실제로 나기리를 목격한 적은 없었어도, 남은 흔적 따위를 볼 때면 한 걸음 걸은 것 같아서 기뻤다.
이제 와서 헷갈리는 거지만, 칸타로는 나기리를 왜 잡고 싶었던 걸까?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 자신의 영웅심리를 위해서인지.
바라고 마지않던 순간에 칸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츠지타ㅡ 나기리는 골목의 어둠에 숨어 눈이 빛나는 것만 살짝 보였다. 한참동안 안 보이던 츠지타는 나기리로 돌아왔다.
왜 잡고 싶었더라? 칸타로는 모르겠다. 그냥 분했던 것 같다. 공로를 인정받고 싶었던 건가. 모르겠다, 간다맨이 되고 싶어서 그랬던 걸지도.
이제까지의 우정은 다 허상이었는지 정체를 들키자마자 나기리는 완전히 경계 태세로 돌입했다. 플래시백이 일어난다. 순수한 트라우마로 몸이 떨렸다. 나기리가 움직일 때 얼핏 보이는 칼날들이 무섭다. 자동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갑고 무거운 금속을 느끼며 칸타로는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전과 같은 상황에서 이 번에 벽에 몰린 건 나기리였다. 돌아가지 않는 정신 한 구석에서 예전과 반대구나, 하는 무심한 감상이 나왔다. 반사적으로 파일드라이버를 겨누고는 있었어도 그 사실 자체가 그는 이해가 안갔다.
츠지타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지 얼마 안 됐다. 갑자기 츠지타가 「사실 내가 나기리야」라고 말해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권총에 머리를 맞아도 뻔뻔히 웃던 흡혈귀가 왜 경계를 가득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빙글빙글 도는 세상 속에서 칸타로는 울렁거림을 느꼈다.
"윽...."
복잡한 사고 속에서 뚜렷한 생각은 「츠지타를 좋아한다」라는 것 뿐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따라오는 의문은 「왜 좋아하는 사람한테 무기를 겨눠야 하는가?」칸타로는 자기가 들고 있으면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고 임계점 돌파, 이제 한계였다. 뭔가 터질 것 같았다.
".....우우... "
간다맨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세상을 지키는 히어로라면 이런 순간 어떻게 했을까.
"우에에엥-!!! 싫습니다, 이런거!!!"
적어도 이렇게 울진 않았을 거다.
3-1
골목길에 주저앉아 칸타로는 엥엥 울었다. 한 손엔 나기리의 손목을 쥔 채였다. 놓으면 어딘가로 가 버려 영원히 보지 못할 거 같았다.
이 자리에서 제일 어리둥절한 건 나기리였다. 이제껏 한 고민과 생각, 잡념들이 전부 쓰잘데기없던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충동에 다시 칼날이 나왔지만, 우엥 우는 칸타로를 보면 힘이 쭉 빠졌다.
"좋아하는데ㅡ 좋아하는데 말입니다..."
칸타로는 계속 울면서 뭐라뭐라 사랑 고백을 씨부려댔다. 나기리로썬 이자식이 나를 잡아 VRC에 쳐넣을건지 죽일건지 뭐 어쩔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야."
"에엥 ㅡ 왜ㅡ 왜 이러지 않으면...엥 ㅡ 에엥 ㅡ"
"..야."
"싫습니다ㅡ 싫어요ㅡ 에엥....."
"얌마!"
손을 떼려 해도 기가 막힐 악력이었다. 나기리는 너무 어이가 없어도 말이 안나온다는 걸 실감했다.
"체포 안 할 거면 놔."
"싫습니다!"
"그럼 뭐 어쩔건데!"
"싫습니다!"
한참을 티격태격 한 끝에 결국 구부러진 건 나기리였다. 힘 빼고 벽에 기댄 나기리는 한숨처럼 한 마디를 했다. "뭘 하고 싶은 거야 너는...."
나기리를 악이라고 생각했다. 반성도 하지 않고 나쁜 짓만 일삼는 말 그대로 악 중의 악.
그러나 역시 그딴 건 흡혈귀가 돌아다니는 세상에서도 좀처럼 만나기 힘든 게 맞나 보다. 세상의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으니. 완벽한 악이라는 게 정말 있던가.
"본 경관은...."
세계를 위협하는 악은 결국 없었다. 있는 건 알 수 없는, 「절대 악」이라고 부르긴 애매한 흡혈귀 뿐이다. 칸타로는 나기리의 사정이 궁금해졌다.
"본 경관은 당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나기리는 흥 혀를 차며 되묻는다. "체포는 안 할거냐, 경관."
"..."
칸타로는 생각해본다. 동경하던 히어로라면 어떻게 했을지. 세상의 주인공이라면 얼마나 그럴듯한 말과 행동을 했을지 말이다. 멋지게 껴안아 준다던가, 「그래도 죄를 뉘우쳐야 합니다」같은 올곧음도 있었겠지. 갱생시켜주면서, 희망도 주는 멋진 말들을 잔뜩 건넸을 지도 모른다.
"...모르겠습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진짜 경관 관둬라.너."
"그치만 좋아하는 분을 어떻게 체포합니까..."
침묵, 나기리는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아까부터 그 말 뿐인데, 내가 나기리라는 걸 정말 알고 있는 거지?"
"아니까 괴로운 겁니다만..."
사실은 잘 모르겠다. 남은 감정은 그저 눈 앞의 흡혈귀가 인생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VRC에 수감되면, 그 기간 동안 떨어져 있을 생각만으로도 슬프다. 괴롭다. 머리가 엉망진창이다.
"....좋아한다는 건, 뭐야?"
"에에- 거기부터 입니까..."
좋아한다는 건. "항상 같이 있고 싶다는 걸까요..." 말로 하자니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래서 같이 살자고 한 건가?"
"그 때는 좀 다른 감정이었습니다!!"
"지금은 같이 살기 싫단 건가?"
"아뇨!! 같이 살고 싶습니다!!!"
골목길은 너저분했다. 나기리의 터전이었다. 쥐가 돌아다니고, 쓰레기 천지에, 사람들을 피해 숨어사는 인생. 나기리는 그 외의 생활은 알지 못했다. 춥고, 불편하고, 낡은 공간은 최악이지만 안정감이 든다.
"...흥. 폐빌딩에서 같이 사는 정도라면 허락해주지. 물론 같은 방은 아니고 내 밑층- "에- 싫습니다." ...."
...너 날 좋아한다며? 그래도 폐빌딩은 싫습니다! 나기리는 짜증이 난다. 체포도 하기 싫고 같이 살기도 싫으면 이 녀석은 뭐 어쩌라는 거냐?
"좋아하면 뭐든지 들어주는 거 아닌가?"
"하지만 폐빌딩은 좀..."
아니, 그런가요... 나기리의 말을 듣고보니, 주인공들의 사랑이 그런 것 같다. 헌신적이고, 뭐든지 해 주고. 숭고할 정도의 감동적인 감정. 사랑에겐 희생적이고 악에겐 신념을 굽히지 않는 멋진 히어로, 간다맨처럼.
"본 경관은 역시 단역인가 봅니다."
"?"
"싫은 건 역시 싫습니다. 당신을 좋아하는 거랑 별개로요... 그러니까요."
그렇군, 역시 세계의 주인공 역할은 일본 작은 마을에 쳐박혀있는 일개 경관이 맡기엔 너무 컸다. 칸타로는 인정했다. 간다맨은 그냥 어릴적 꿈이었다는 걸. 그는 어차피 단역에 불과했으니,
"당신도 싫어하는 걸 알려 주세요. 서로 맞춰갑시다."
단역의 사랑방식밖에 할 줄 모른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