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너무 보고싶었어
닌자보이란타로/하치라이

 

 

 

0

 

 

"뭐 읽고 있어?" 

 

"사부로." 

 

 

평온한 휴식시간이다. 커다란 나무 밑은 책 읽다 깜빡 잠들어도 편안했으니 애정하는 장소였다. 한참 집중해서 읽던 중에 느닷없이 옆에서 팔이 쑥 튀어나왔다. 예의범절없는 손은 라이조의 손 위로 책을 잡았다. "호오-... 어디보자,... 흐음흐음." 몇 초 쓰윽 책을 훑던 시선은 금새 사라지고 대신 어깨가 무거워졌다. 

 

 

"염정소설?" 

 

"응? 으응." 

 

"너 이런 것도 읽었어?" 

 

"아니, 그냥...새로 나왔길래." 

 

 

"낭만적이네. 어느 때건, 어디서건, 어떤 모습이건간에 사랑하겠다는데." 말하는 목소리에는 내용과는 다르게 미묘하게 조롱하는 투가 섞여 있다. "으응." 라이조는 대꾸하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흘러넘겼다. 미약한 반응에도 사부로는 딱히 개의치않아했다.

 

 

 

나란히 나무에 기대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건 꽤나 좋아하는 순간이다. 나뭇잎 사이로 지나가는 구름의 속도를 계늠해보는 걸 좋아했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자리잡혔다.  이 아래는 기분좋은 것 뿐이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도, 밑으로 느껴지는 간지러운 잔디도, 옷감이 흡수한 햇빛의 따뜻함이라던지, 옆에서 책을 넘기는 소리까지도.

 

 

멍때리고 있자면 책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로는 나무에 좀 더 깊게 기댔다. 그리곤 곧이어 올 소리들을 기다렸다. 이제 나른한 한숨 소리와 함께, 사락거리며 옷감이 나무에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좀 더 편안한 분위기가 될 것이다. 역시 사랑해 마지않는 한 때였다.

 

 

*

 

 

잠에 들락말락한 몽롱한 의식 한 켠 떠오른 건 방금 얼핏 훔쳐본 책의 문구이다. 사부로는 희미한 정신으로, 「언제 어디서나 어떤 모습이건간에 사랑하겠다니, 거창한 말이야...」 생각하며 비웃었다. 얼핏 깔보는 마음이 담겨 있는 생각이다. 염정소설에선 흔하디 흔한 말이었으니까. 그 따위 문구에 가슴 설레하는 건 너무 바보같지 않은가? 한켠으론 라이조라면 가능할거라고도  생각했다. 라이조라면, 좋아하는 사람이 바퀴벌레가 된다고 해도 변함없이 대할 것 같다. 

 

졸린 의식에서 나오는 세타파는 백일몽을 꾸게 만든다. 사부로는 그대로 꾸벅꾸벅, 「아니, 역시 바퀴벌레는 좀 아닌가...」 나 「하치자에몽은 확실히 좋아할텐데」 를 거쳐, 「설마 그거까지 먹진 않겠지... 」 라는 황당한 공상을 하다가 까무룩 잠에 들었다.

 

 

 

1

 

 

 

꿈을 꾸게 해주는 벌레래. 

 

 

몇년 전인가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뇌를 쓰는게 얼마만이던가? 뭐라더라, 이빨에 독이 있어서, 물리면 일시적으로 기절하며 이내 7일동안 환각을 본다고. 그런데, 그 환각이라는 게 정말 간절하게 보고 싶은 걸 보여주더랬다. 암암리에 벌레 독을 희석해서 거래할만큼이나 뒷소문이 자자했다. 

 

처음 하치자에몽이 소개해줬을 땐 「아, 그래」 정도였고, 프로로 갓 취직했을 때 선배의 말엔 「예전에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정도의 감상이었다. 라이조는 뭐라고 했었더라.

 

사부로는 벌레가 든 통을 바라봤다. 꿈 속에서 만나게 되면 물어보자. 

 

 

24살, 비익조는 더는 날 수 없게 됐다. 사부로는 따라 죽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 어떤 의지도 들지 않았다. 죽기 위해선 어디로든 걸어가야 했는데, 그는 일어설 수 조차 없었다.

 

친구들은 모두 사부로도 죽을까봐 걱정했다. 혹은 미친 것처럼 발작하거나 실성할까봐도 염려했다. 사부로는 의외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뭔가 했을지도 모르지만,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으니 원. 그는 소식을 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은 채 먹지도, 마시지도, 생각하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이마저도 그나마 직접 임종을 보지 않아 가능했을 것이다. 눈 앞에서 죽는 그 꼴을 봤다면 진작 타케야의 걱정처럼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 때부터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모르겠다. 어차피 다 의미없으니 아무 감흥도 없다. 하치야 사부로라는 사람에겐 후와 라이조 말고도 다른 인연들이 분명히 많았지만, 그건 「후와 라이조로 변장한 하치야 사부로」의 이야기고. 

 

이 벌레의 이야기는 누가 또 해준건지. 누가 여기까지 와서 놓고 가준건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고, 기억하기도 싫다. 남은 건 언제 들은건지도 모르겠는 말 한마디 뿐. 꿈을 꾸게 해 주는 벌레래. 

 

처음 드는 감상은 「아,그래」였고, 두번째는 「예전에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기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꿈 속에서 만나게 되면 물어보자. 라이조라면 사부로가 죽었을 때 어떻게 할건지. 구체적으로는, 네가 사부로라면 라이조가 죽었을 때 어떻게 할 것 같은지. 모두 라이조가 결정해주길 바란다. 죽는다고 하면 죽을 거고 산다고 답하면 어떻게든 숨만이라도 붙어 있겠다. 꿈 속의 라이조는 사부로의 기억에 불과하니, 결국 모든 대답이 망상이겠지만, 그는 그 이후 망상조차 하지 못했으니 좋은 일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자니 사부로의 인생은 대부분 라이조의 결정이었다.

 

 

 

2

 

 

 

"괜찮아?"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보인 건 이사쿠였다. 라이조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갑자기 엄청난 두통이 몰려와 다시 누웠다. 무리하지마, 믿음직한 목소리가 이마를 눌렀다. 지끈지끈 울리는 머리를 붙잡지도 못한 채 라이조는 주변을 둘러봤다. 물수건을 든 란타로와 후시키조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가 왜 여기..." 

 

"기억안나?"

 

"라이조 선배, 산에서 갑자기 쓰러졌어요."

 

 

정신을 잃은 그를 보건실까지 옮겨준 건 타케야랬다. 사부로는? 잠깐 의뭉스럽게 생각했지만, 곧 사부로는 새벽부터 학원장의 심부름을 하러 자리를 비웠다는게 떠올랐다. 

 

 

"아아.."

 

정신이 확실히 돌아온 걸 보고 옆에 옹기종기 모였던 보건위원들은 하나 둘 떠나갔다. 한명은 선생님을 부르러 갔겠지. 라이조는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며 사부로에게 뭐라고 말할까 고민했다. 쓰러졌다는 걸 알면 걱정할텐데, 그리고 다시는 학원장 심부름 따위 혼자서는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퍽 고심하다가, 라이조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뭐, 그럴리는 없나. 

 

 

 "왜 웃어?" 

 

"아니, 잠깐 생각을... 와악!!"

 

 

언제부터 있었는지, 갑자기 말을 걸어온 형체에 라이조는 깜짝 놀랐다. "악." 갑자기 머리를 움직인 탓에 다시 찾아온 두통이 아프다. 이번엔 그래도 아픈 부위를 감쌀 정도는 됐다. 두통이 가시고, 시야가 좀 개이자, 겨우 라이조는 옆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어...."

 

 

누구신가요? 라고 묻기도, 경계하기도 전에, 라이조는 정체모를 사람에게 끌어안겼다. 괴한은 침대에 누운 라이조를 끌어안느라 불편한 자세에도 개의치 않아했다. 라이조는 화를 낼지, 아니면 뭐라고 말을 걸어 볼지 망설였다. 으~음..., 갈팡질팡하는 고민 소리를 들은 형체는 더욱 더 꽈악 힘을 주었다.

 

 

"저..."

 

 

떼어내려 든 손은, 흐느낌에 목적을 잃고 어쩔 수 없이 부드럽게 내려왔다. 라이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퍽 익숙하다. 에? 사부로? 놀라서 뱉은 말에 돌아오는 말은 가늘었다. 나,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라이조는 당황해서 몸을 굳혔다. 그런 의문을 해결해주려 하지도 않고, 24살의 사부로는 14살의 라이조를 한참이나 껴안고 있었다.

 

 

"..." 

 

 

라이조는 떨떠름한 채였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더듬더듬 팔을 올려 마주안으면서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사부로... 인가?" 물어보는 말엔 확신이 없었다. 사부로는 대답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뭐야, 변장한거야? 심부름은 다녀 온거야? 어떻게 된 거야. 이것저것 물어보려던 라이조는 곧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던 것과 체격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슬며시 팔을 떼면서, 그는 거절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가만히 안겨 있었다.

 

 

어색한 침묵은 보건위원의 고문 선생이 오는 기척으로 끝났다. 라이조는 그새야 위에 뒤덮이다시피한 어깨를 밀어내려했지만, 어쩐 일인지 꿈쩍도 하질 않았다. 둘이라면 완력은 라이조가 좀 더 셌을 텐데, 갑자기 돌연 오싹함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진짜 누구세요?

 

 

"라이조, 정신 차린거니?"

 

"선생님!"

 

 

라이조는 선생이 이 상황을 타개해줄 거라고 믿었다. 우물쭈물, 울망울망한 시선을 마주한 고문•니이노 히로카즈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팔을 공중에 휘적거리고 있냐고. 

 

 

*

 

 

"즉?" 

 

"즉이라니?" 

 

"그러니까, 결국 넌... 뭐냐는 건데." 

 

 

사부로가 돌아오지 않아 빈 방에서, 라이조는 정좌한 채 「사부로」와 마주보고 있었다. 

 

 

"너무해, 라이조. 날 못 알아 보는거야?"

 

 

체격도, 목소리도 알던 것과 조금씩 다르다. 그 중 제일 다른 점은 「사부로」가 라이조의 변장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라이조가 아는 사람의 얼굴도 아니었다. 키가 살짝 크고 듬직해진 「사부로」는, 섭섭해하는 모습만은 알던 것과 비슷했다. 라이조는 불합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알아보라는 거야?, 하지만 태도만은 너무나도 사부로같다.

 

정성껏 달여준 두통약을 그렇게 들이켰는데 머리가 또 아파왔다. 사부로는 왜 돌아오지 않는 걸까? 「사부로」는 왜 나한테만 보이는 거지. 머리를 핑핑 굴리고 있자 "아." 깨달은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응?" 

 

"이제 됐지?" 

 

 

고개를 드니 아까의 모르는 사람은 온데간데 없고 라이조의 얼굴이 앉아있다. 사부로는 멋대로 방을 뒤져 거울을 찾아내선, 요리조리 얼굴을 살펴봤다. 그리곤 흐뭇하게 웃었다. 음,그래. 

 

 

"이제 익숙하지?" 

 

"익숙하냐고 하다면야..." 익숙하지, 그러나 어색한 듯도 했다. 몸은 커다란데 얼굴만은 14살의 앳된 라이조였으니. "으음...." 

 

"아직도?" 

 

"아니, 사부로인건 알겠는데... 알겠는데 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도, 사부로는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왜 너는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냐고 물어도, 역시 자기도 모른댄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사부로는 고민하는 라이조를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민이 흐지부지 지워져 희미해질 때까지도 시선은 떨어지질 않았다. 라이조는 팔짱을 끼고 몸을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최악의 상상에 치닫았다.

 

 

"사부로,... 죽은거야?" 

 

 

무서워져서 라이조는 사부로의 팔을 붙잡아 더듬어댔다. 왜 체격이 다른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니 영혼과 다름없지 않은가. 죽은건 너잖아. 속삭임은 너무 작아서 옷이 스치는 소리에 지워졌다. 만져지는 체온은 이렇게도 따스한데 말이다. 

 

 

좋은 기회라고, 사부로는 질문하려 했다. 「죽었다고 하면 어떻게 할거야? 」, 돌아오는 대답대로 눈을 뜨면 실행할 생각에. 그러나 울상인 표정이 눈에 들어오자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사부로, 죽은거야...?" 

 

 

울컥 하고,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의식할 새도 없이 줄줄 흐른 물은 몇 겹의 가면을 타고 내려오느라 나중에야 눈치챘다. 라이조는 울기 시작한 사부로를 보고 깜짝 놀라서, 정말 죽어서 영혼으로 나타난건가 싶었지만, 깊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처음 들어보는, 우는 소리가 귀에 박힌 탓이다. 사부로는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소리내서 울었다. 라이조도 울 것 같아졌으나, 알아챈 사부로가 고개를 저어대서 겨우 참을 수 있었다. 아마 사부로는 「나는 안죽었어」 라고 말하고 싶었겠다.

 

 

*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건 라이조의 꿈이야." 

 

 

사실 내 꿈이겠지만. 사부로는 말을 삼켰다. "이렇게 현실감있는데..." 중얼거린 라이조는 사부로를 보고 납득했다. 꿈이라면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왜 10년 후의 사부로가?" 

 

"글쎄, 라이조의 취향 아니야?" 

 

 

내 취향이라니..., 사부로는 여전히 14살 라이조의 얼굴을 하고 있다. 둥글둥글한 얼굴에 비해 몸이 너무 다부졌다. 라이조는 자기 몸을 내려다봤다. 음, 지금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힐끔 쳐다본 사부로의 몸은 너무 어른이었다.

 

 

"어떻게 하면 일어날 수 있을까?" 

 

"글쎄, 라이조는 어떻게 생각해?"

 

 

나한테 물어봐도..., 라이조는 팔짱을 끼곤,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저러다 잠든 횟수도 적지 않았다. 고민하는 모습을 보는 건 예전에도 좋아했지만 지금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향후의 일을 물어보고 싶었는데, 방은 너무나도 친숙하고 너무나도 따뜻했다. 으~음, 저 소리들은 의식해서 내는 걸까, 아닐까.

 

잠에 들고 싶다. 배도 고픈 것 같다. 갑자기 목도 마른 것 같고, 갑자기 몸이 다 아픈 느낌이었다. 눈 앞의 사람은 10살이나 어린데도, 찡얼거리고 싶은 충동이 마구 들었다. 만지고, 껴안고, 쓰다듬어주면서, 이 기분이 사라질 때까지 달래주길 원한다. 살아있다는 감각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길 바랐다. 

 

 

욕심이 무색하게 "일단 잘까!" 라이조는 웃었다. 14살에 어울리는 웃음이다. 깊게 생각하지만 어딘가에 빠지지 않는 건 그의 장점이었다. 설령 땅굴을 파고 기어들어간대도 옆에 있어주겠지만. 사부로는 잠들기 무서웠으나, 라이조가 잘 준비를 해서 그냥 따라했다.

 

 

"잘자." 꿈인데도 잔다니 웃기다, 라고 말했다.

 

"잘자..." 사부로는 그런 말까지도 좋았다.

 

 

 

2-1

 

 

 

"자는거야?" 

 

"...."

 

"..."

 

 

나 무서워.

 

 

 

3

 

 

 

처음엔 밝게 「잘자」 말하던 라이조도, 횟수가 세 번을 넘어가자 점점 의기소침해졌다. 「꿈」속의 인술학원은, 14살의 사부로 대신 24살의 사부로가 있는 걸 빼면 평소와 똑같았다. 모두에게 사부로가 어디있는지 아냐고 물어보려고 해도, 다들 라이조에게 먼저 물었다. 라이조, 사부로는? 

 

라이조가 모르면 누가 알아.

 

24살의 사부로는 여전히 어린 라이조의 얼굴로 변장한 채였고, 여전히 라이조에게만 보였다. 라이조는 슬슬 깨어나고 싶었다. 일어나서, 진짜 사부로를 만나고 싶다. 어쩐지 꿈 속인데도 학원은 사부로의 실종에 웅성거렸다. 아직 그렇게 크진 않지만, 걱정이 하나 둘 쌓이고 있었다. 몇몇은 사부로라면 괜찮을거라고 라이조를 위로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더 빨리 깨어나고 싶어졌다.

 

 

도서관에 틀어박혀도 꿈에 대한 이야기는 의외로 몇 권 나오지 않았다. 구체적인 연구글을 바랐건만 야한 염정소설 몇 권에서 소재로 보이는 게 전부였다. 라이조는 점점, 옆을 졸졸 쫓아다니는 사부로의 존재를 본체만체하고 책에만 틀어박혔다.

 

 

"뭐 읽고 있어?" 

 

"... " 

 

 

그저그런 휴식시간이다. 「사부로」가 돌아오지 않게 된 후 점점 자습 혹은 실습만 늘었다. 커다란 나무 밑은, 예전엔 책 읽다 깜빡 잠들만큼 편안한 장소였지만, 지금은 여유마저 사치로 느껴진다. 꿈을 소재로 한다면, 어느 정도의 배경 지식이 필요할 것이다. 라이조는 춘화라도 기꺼이 읽을 만큼 혈안이었다. 한참 열심히 읽는데 느닷없이 옆에서 팔이 쑥 튀어나와서, 예의범절없게도 책을 잡아챘다. "흐음..." 몇 초 쓰윽 책을 훑던 시선은 금새 사라지고 대신 어깨가 무거워졌다. 

 

 

"염정소설?"

 

"응. 꿈 속이 주제거든." 

 

 

너 그런 것도 읽었어? 사부로는 라이조의 어깨에 기대서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뭐, 조용한 것도 좋아.

 

근래 라이조는 점점 불안해했다. 사부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만은 라이조의 결정에 따르기 싫었다. 이 속에선 아직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라이조는 점점 14살의 사부로만을 걱정했다. 그래도 좋다, 왜냐면 사부로의 현실엔 더는 죽을까봐 걱정되는 사람이 없으니까. 다른 데 관심이 더 많대도, 진짜가 아니더라도, 옆에 있게만 해준다면야.

 

나란히 나무에 기대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건 꽤나 좋아하던, 좋아하는 순간이다. 나뭇잎 사이로 지나가는 구름의 속도를 계늠해보는 걸 좋아했다. 그래, 좋아했었다. 입가에 미소는 살짝 씁슬하게 자리잡았다.  그래도 이 아래는 여전히 기분좋은 것 뿐이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도, 밑으로 느껴지는 간지러운 잔디도, 옷감이 흡수한 햇빛의 따뜻함이라던지, 책을 넘기는 소리까지도.

 

멍때리고 있자, 책을 덮는 소리가 났다. 그대로 라이조는 휙 옆을 쳐다봤다. 

 

 

"사부로, 있잖아, 생각해봤는데."

 

 

꿈 속에서 죽으면 깨어나지 않을까?

 

 

*

 

 

핫. 

 

 

정신을 차려보니 저녁이었고, 방 안이안이었다. 밑엔 라이조가 깔려있었다. 뭐가 「간절하게 보고 싶은 소원」이야. 사부로는 이딴 거 바란 적이 없었다.

 

이불도 없이 맨바닥에 깔려있는 라이조는 퍽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제야 사부로는 의식이 확 돌아왔다. 왜 이러고 있는지도, 라이조가 충격받은 이유가 뭔지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뭐라고 들은 것 같은데, 막 깬 뇌는 방금 들은 말도 제대로 흡수가 안됐다. 

 

 

"...뭐?"

 

"뭐라니?"

 

"방금 뭐라고 했잖아."

 

"그건 사부로잖아..."

 

 

못 알아들을 말이나 하고. 그렇게 들어도, 사부로에겐 방금 전까지의 기억이 없었다. 마지막 기억은 그 끔찍한 말 뿐이다. 

 

 

"너야말로, 이상한 말 하잖아." 

 

"내가 뭐?" 

 

"죽으면 깨어날 수 있다든가... " 

 

"그건-..." 

 

 

시끄러워. 사부로는 무심코 손에 힘을 줬다. 아, 하는 소리에야 겨우 라이조의 손목을 잡아 누르고 있는게 보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잡고 있었던 걸까? 확인하지 않아도 잡힌 곳은 분명 붉을 것이다. 하지만 손을 떼어 줄 마음따윈 없다. 오히려 더 잡았으면 잡았지. 신기한 일이다. 다치게 하고 싶은적 따위 한 번도 없었는데.

 

 

"웃기지 말라고. 잘들어, 라이조!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죽으면 죽는걸로 다 끝이야. 그 이후같은 건 없어." 사부로는 제법 흉흉하게 노려보려고 애썼다. "설령 꿈이라고 해도..." 하지만 점점 시야가 흐려지는 것이다. 

 

죽으면... 죽으면 말야... , 말도 함께 흐려지고 만다.

 

 

"죽는건..."

 

"..."

 

 

라이조의 얼굴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제야 라이조는 사부로가 또 울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사부로..."

 

"왜..."

 

"..."

 

"왜 죽은거야..." 

 

 

라이조는 가만있다가, 몸에서 힘을 뺐다. 그래도 손목을 잡은 힘은 강한 채였다. 체격 좋은 어깨 너머로 보이는 천장은 작아보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진정될때까지 기다리던 라이조는 조용히 내뱉었다.

 

"... 누구 얘기야?" 

 

얼핏 중얼거림같기도 하다.

 

 

24살의 사부로는 대답 대신 가면을 벗어던졌다.

 

 

*

 

 

둘이 「그런」 사이였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학원을 입학할 때 심어진 관계는 재학 중에 쓱쑥 자라선 졸업하자 꽃을 폈더랬다. 어떻게 똑같은 얼굴에 성애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라이조는 그게 가능힌 것 같았다. 

 

사부로로 말하자면, 그는 당연히 사랑한다. 사랑에 종류가 몇 가지 있든 몇 백가지있든지간에, 그 종류별로 전부 사랑한다.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알게 뭐야, 남들이 어떻게 보던 말던. 하나도 신경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건 「남들에게 신경쓰는 라이조」를 신경쓰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묘한데서 결단력있는 라이조는 한 번 결정을 내리면 딱히 쑥스러워하는 법이 없었다. 가끔은 천하의 사부로마저 낯간지러워질만큼 대담하기도 했다.

 

사부로가 라이조를 소중하게 대한 것처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라이조도 그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건 어떤 상황이던지 의심할 데가 없었다. 사부로는 남의 마음 읽기에 천재였고, 커다란 안심감은 가끔 자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얼마나 오만방자하게 군대도 라이조는 결국 다 받아주고, 결국은 다 용서했다. 

 

라이조는 절대 사부로를 미워할 수 없었고, 사부로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라이조의 얼굴로 이런 장난 저런 장난 치고다니는 건 응석부리기에 가까웠다. 절대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고 하면 단연코 우리 둘이다. 그렇게 자신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런」 사이가 아니기도 한 이유는 스킨쉽의 부재에 있다.

 

라이조는 한번도 직접적으로 맨얼굴을 보여달라고 하거나 가면을 벗어달라고 요구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후와 라이조라는 사람은 표정으로 마음이 엿보이곤 했다. 다시 말하지만, 사부로는 남의 마음 읽기의 천재였다. 라이조는 사부로의 가면을 썩 좋아히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런일을 할 때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해야하나.

 

같이 밤을 지샌게 밥 먹은 횟수보다 많아졌어도 입을 맞추는 횟수는 두 손가락 안에 든다. 가면의 감촉이 별로인 듯 했다. 사부로도 또한, 수많은 가면 너머로 입을 맞대니 행위의 분위기는 알아도 그게 어떤 느낌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행간에서는 차라리 성교보다 입맞춤이 배는 더 교감을 나누는 행위라고들 한다. 그러나 남들이 뭐라하던간에, 사부로는 입맞춤이 별로 없어도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또 전할 수 있었으니 굳이 맨얼굴을 보여준 일이 없었다.

 

 

"...."

 

 

벗어낸 가면 아래에는 24살의 라이조의 얼굴이 있다. 10년 후의 자기 얼굴이더라도, 라이조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오히려 왜 이제까지, 14살의 라이조 가면을 쓰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쪽이 더 잘어울리는데.

 

 

"너..."

 

"나?"

 

"네 이야기야, 너. 라이조, 너 말이야..." 

 

 

잡은 손목은 마지막 기억보다 훨씬 작고, 훨씬 얇았다. 사부로는 14살을 탐하기엔 너무 자랐다. 10년을 더 산 사부로에겐 옛날의 라이조는 너무 앳돼보인다. 

 

14살에는 뭘 했더라? 매일매일 장난치고, 놀고, 가끔 싸움도 하고. 헤이스케랑 두부도 먹고, 그러다 질려서 피해다니기도 하고. 헤이스케도 어른이 되어서, 이젠 옛날처럼 식고문을 하려 들지 않았다. 졸업하고 다들 바빠졌고, 다들 어른이 됐다.

 

뭐가 「간절하게 보고 싶은 소원」이란말인가. 사부로는 14살의 라이조에게 만족할 수 없는데. 24살의 라이조가 어떻게 웃는지 아는 사부로는 이런 아이로는 도저히 마음을 충족할 수 없다. 대체 어떻게 만족하란 말인가? 환각은 개뿔, 기왕 보여줄 거라면 더 행복하고, 더 깨어나기 싫은 것을 보여줄 것이지. 

 

왜 여기에서, 10살도 어린 라이조한테 화를 내면서, 그 입에서 「죽으면 되지 않을까」 라는 말을 듣게 만드는 건지. 뭐 어쩌라는 말인가. 역시 벌레 따윌 믿는게 아니었다.

 

그립다. 그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눈 앞의 라이조는 분명 라이조가 맞지만, 지금의 사부로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부로는 졸업하고 계속 함께 있던 라이조가 그리웠다.

 

 

"네가 죽어서 이렇게 된 거야."

 

"...내가."

 

"네가 죽어서, 난 네 시체도 못봤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휴일에 같이 경단 사먹으러 가자고 해놓고선, 축제를 보러 가자고 유카타도 같이 맞췄는데, 다음에 남만에 가보자고, 그리고 겨울에는 산에 오르기로 했었잖아. 머리가 너무 길어져서 좀 잘라야겠다고도 했으면서. 다같이 간만에 만나기로도 했잖아. 다들 맞춰서 휴가까지 썼다고,... "

 

"...."

 

 

사부로는 훌쩍거리면서 읊조렸다. "하치야 사부로 있는 곳에 후와 라이조 있다고도 해줬잖아..." 몸은 천천히 쓰러져 내려갔다. 라이조의 어깨에 머리를 비빈 사부로는 연신 빌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알려줘. 어떻게 하면 좋은지 가르쳐줘... 

 

 

"...저기."

 

"...응."

 

 

사부로는 돌아올 말을 예상해본다. 미안해,라던가. 혹은 괜찮다던지. 아무튼 어떠한 부드러운 위로를 생각했으나, 돌아온 것은 "내가 아니야." 라는 말이었다.

 

 

"난 죽지도 않았고, 너랑 그런 약속을 한 적도 없는걸."

 

 

몸에 힘이 탁 빠진다. 맥이 풀린다고 해야하나, 어안이 벙벙하다고 해야할지. 아무튼 예상에서 확 벗어난 대답이었다. 힘이 빠진 틈을 타서, 라이조는 사부로를 슬쩍 밀쳐냈다. 똑바로 앉은 그는 자세만큼이나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네가 말하는 건 다 이상해."

 

그 시선엔 위로도, 동정도, 연민이라던가, 하여튼 따뜻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4

 

 

 

「사부로」는 라이조가 자길 그닥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여하튼 수수께끼의 존재였으니까. 사부로는 저만큼 자라는 걸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나도 저만큼 자라야 할텐데, 싶기도 했다.

 

그 때의 두사람은 아직 진전중에 있었다. 나란히 각각 누워서, 이불 밖으로 손을 잇고 자는 게 그나마 제일 야한 짓이었다. 한번, 입을 맞춰볼 기회가 있긴 했었다. 떨리고, 두근거리고, 긴장대던 마음은 가면의 감촉에 조금 사그라들었다. 겨우 손이라고 해도, 진짜 피부에 맞닿는게 훨씬 더 좋고, 몇 배는 더 야한 기분이 들었다. 

 

 

꿈 속이라지만 24살의 사부로는 10년의 미래를 상상하게 했다. 한켠으로는 24살의 라이조 변장을 하지 않는게 신경쓰였다. 그래서,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가면 아래 좀 더 성숙해보이는 자기 얼굴에 살짝 안심도 했다. 이대로 꿈 속에 갇혀서, 일어날 수 없게 된다면, 앞으로 평생 이 영혼같은 사부로와 지내야 하는건가. 뭘 해도 깰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이 사부로가 나이를 먹는 지는 모르겠지만. 느닷없이 10년 후의 사부로라고 해도 받아들일 정도로, 라이조는 사부로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내심 그는 두 사람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10살 더 먹은 사부로. 내가 아는 사부로의 10년 후 모습. 그러니 받아들인거고, 그러니 같이 꿈 속을 유영하건말건, 대신 실종된 「사부로」도 찾아다니지 않고 냅둘 수 있던 건데. 가끔씩은 「내가 깨어나면 이 사부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걱정도 들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다 바보같이 느껴졌고, 「사부로」가 너무 보고싶어졌다. 

 

 

"난 깨어나고 싶어."

 

"뭐..."

 

"지금, 사부로가 너무 보고 싶어졌는걸."

 

"..."

 

"너, 사실은 깨는 방법 아는 거 아니야? 가르쳐줄래?"

 

"...몰라, 아니. 뭐야?" 붉었던 눈시울은 가면 너머로도 알 만큼 하얗게 변했다. "... 내 얘기 들은거 맞지?"

 

"들었어. 들었으니까 말하는 거잖아."

 

 

대체, 모두들 라이조를 착하고 인심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줬지만, 라이조는 스스로 딱히 착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무던한 탓에 괜찮은 범위가 넓은 것 뿐이고, 어느쪽이냐 하면 섬세하질 못하니까. 겉으로 보기에 입이 세보이는 사부로가 좀 더 착하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짓꿎을진 몰라도, 사부로는 본래 남의 마음을 잘 읽고, 그만큼 신경써주는 일이 많았으니까. 

 

그렇게 호구도 아니고, 마냥 호인도 아니었다. 고민만 많을 뿐이지, 장난 치는 것도 사실 꽤 좋아하고, 갖고 싶은 건 양보하기 싫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좀 더 우선하는게 당연하다. 원래가 두뇌명석 냉정체질. 라이조는 눈 앞의 남자와 「사부로」를 타인으로 인식했다.

 

 

"난 너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너도 마찬가지잖아."

 

"...아니야, 라이조... 넌..."

 

"아니야. 내가 아니니까. 방법을 모른다면 이젠 또 말리지 말아줘."

 

"...어? 죽, 죽으려고? 지금? ... 지금?! 내 앞에서? 방금 그렇게 말했는데?"

 

"말했잖아, 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너한테 받고 싶은 것도 없고. 뭣보다, 이제 일어나지 않으면 사부로가 걱정할거야."

 

 

그 말에, 사부로는 상처받는 것보다 먼저 감탄했다. 그러나 감탄은 감탄이고, 상처받은 건 또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할거야...?"

 

으~음. "역시 그건 좀 너무하지. 난 저기 뒷쪽 산에 올라갈 테니까 넌 여기 있어도 돼."

 

"아니, 기다려. 기다려줘, 라이조.... 지금부터 죽으러 갑니다, 처럼 말하면 견딜 수 없어..."

 

 

아까,  처음으로 「죽으면 깨어나지 않을까」 라고 말했을 때 보여준 살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라이조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둘을 타인으로 분리한 것처럼, 저쪽도 똑같이 생각한 모양이라고 여겼다. 갑자기 꿈 속에서 「네가 죽어서 망가졌으니 도와줘」 라고 들어도 대체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미안하지만, 있잖아.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같은건 나한테 물어보면 안 돼. 난 고민하는 버릇이 있는걸. 그렇게 중요한 걸 골라달라고 해도 할 수 없어." 

 

"그치만..."

 

"내 말 때문에 얽매이는 건 더 싫고 말이지. 네가 아는 내가 죽은 건 슬픈 일이야... 나도, 사부로가 죽으면 엄청 괴로울거야."

 

"그러면,"

 

"그러니까 난 빨리 깨어나야겠어."

 

 

너무 안일어나면 사부로가 슬퍼할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웃으면, 그렇게 어리게 웃어버리면 돌려줄 말이 없다. 

 

 

왜 갑자기 하고 싶어졌는진 모르겠지만, 사부로는 부탁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입 맞춰줄 수 있어? 그는 처음으로 가면을 벗을 결심까지 했다.

 

그랬건만, 라이조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럼, 한번만 껴안아라도 줘..." 차라리 불쌍한 부탁이다. 

 

 

라이조는 잠시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고민할 정도라고? 사부로는 또 감탄했고, 또 상처받았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탁은 점점 작은것으로 변해간다. 손이라도 잡아 줄래.. 손끝만이라도 좋으니까. 신기한 일이지만, 내포된 울림은 더 깊어만 졌다. 기어코, 라이조에게서의 마지막 스킨쉽으로 인생을 정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미안해, 그럼 더 안되겠어." 

 

"왜..." 

 

"왜냐면 사부로가 가엾잖아."

 

 

이럴 때의 라이조는 퍽 단호했다. 사부로는 그게 「내」일인지 아니면 「사부로」의 일인지 헷갈렸으나 어느쪽이건간에 라이조가 너무하다는 느낌이 들어 입을 닫았다. 의외로...., 의외로 말야.

 

 

"나쁜 남자였구나, 라이조는." 

 

"「나」는 그럴지도 몰라."

 

 

사부로는 멍하니 쳐다보다가, 허탈하게 하하 웃었다. 그렇구나. 울음이 날 것 같다. 그는 애써 웃으며 비난했다. 나쁘다, 못됐어. 너무해. 손 정도는 잡아줘도 되잖아. 그러면 라이조는 아까의 단호하고 차가운 거절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따뜻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사부로의 어휘력없는 비난은 한참 주절주절 투정으로 이어지다, 이내 띄엄띄엄 끊어졌다. 

 

 

"넌 진짜... 나쁜 녀석이야." 

 

 

 

0-1

 

 

 

바퀴벌레? 갑자기 들려온 잠꼬대는 졸음을 살짝 쫓아냈다. 어느새 졸 뻔했나보다. 바람에 나무가 기분좋게 살랑거렸고, 읽다 만 책은 언제 내려놨는지 야무지게 책갈피까지 꽂혀있었다. 하암. 다시 그대로 졸려는 라이조의 귀에 또 다시 웅얼거림이 들렸다. 

 

 

"라이조는..."

 

"사부로?"

 

 

라이조는 사부로에게 몸을 가까이 했다. 사부로는 반쯤 잠에 빠져 중얼거렸다. 아하, 좋아하는 사람이 벌레가 되면?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이조는 기왕 들은 거 고민해보기로 했다. 사부로는 「라이조라면 벌레가 되어도 계속 좋아할 것 같다」  고 생각하는 듯하다. 

 

어느새 졸음이 싹 가셨다. 라이조는 나무에 기대 팔짱을 끼고 신음했다. 그 사이에도 옆에선 연신 뭐라고 말소리가 끊기질 않았다.

 

 

「아니, 역시 바퀴벌레는 좀 아닌가...」 나,

 

 「하치자에몽은 확실히 좋아할텐데」 를 거쳐,

 

 「설마 그거까지 먹진 않겠지... 」 까지.

 

 

"하하하."

 

 

라이조는 생각해봤다. 사부로가 벌레로 변해버린다면, 음. 글쎄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러니까. 역시 자연에 방생하지 않으려나. 사람인 사부로만큼 좋아할 순 없다고 생각하는데.

 

 

 

5

 

 

 

일어나니 벌레들이 말라죽어 있었다. 대신 개미나 거미 따위가 지나다닌다. 사부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봤다. 온 몸이 다 뻐근하고, 기운이 엄청 없었다. 얼굴을 더듬어보자 먼지가 수북히 나왔다. 가면 몇 장을 뜯어내도 먼지는 겹겹이 틈새 사이사이로 잘도 들어가 있다.

 

 

"나쁜 자식."

 

 

결국 꿈 속에서 죽어본 건 사부로였다. 꿈에서 만난 어린 라이조는 맹랑하게도, 비난하건 말건 정말로 뒷산으로 향했다. 어차피 사부로의 꿈이었으니 사부로가 죽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는데. 그래, 그래서 죽어 준거다. 10년 전의 자신, 아니, 어떤 하치야 사부로를 위해서. 

 

 

됐거든. 너같은 거 이제 나도 몰라. 사부로는 눈도 아프고, 모든게 다 찝찝했다. 집도 몸도 마음도 다. 짜증나게 수북한 가면과, 겹겹이 쓴 가발들을 다 뜯어내고, 그는 아주아주 간만에 맨 얼굴이 되어 봤다. 

 

「하치야 사부로」라는 사람은 쭉 「후와 라이조의 변장을 한 하치야 사부로」 라는 존재였다. 하지만 젠장할 이제 알게 뭔가. 사부로는 현실에서도 따라 죽기로 결심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후와 라이조의 변장을 한 하치야 사부로」가 아니었다. 

 

 

이제부턴 변장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오기에 가까웠다. 먼저 죽어버리고선, 꿈 속에서마저도 잔인하게 차가웠던 라이조에게 하는 복수였다. 사부로는 창문을 활짝 열곤 하늘에 삿대질했다. 

 

"누가 그렇게 빨리 죽으래?! 난 앞으로 너 말고 다른 모든 사람들한테 내 맨얼굴을 보여줄거거든! 너만 내 얼굴 못 보는거야!"

 

 

실컷 씩씩대고는, 사부로는 뒤를 돌아봤다. 새로 맞춘 유카타두 벌과 미용책, 가위따위가 널부러져있었다. 그 옆에는 말라 비틀어져 죽어있는 벌레들. 아아, 기억났다. 타케야가 "꿈을 꾸게 해주는 벌레야."라고 소개했을 때, 라이조는 퍽 건조하게 대답했었다. 와, 물리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라고. 

 

 

"보고싶다, 젠장..."

 

 

 

5-1

 

 

 

욕설 비스무리한 게 들려서, 라이조는 눈을 떴다. 썩 개운치않은 기상이다. 하지만 곧 상냥한 목소리가 들리고, 잡념을 지워냈다.

 

 

"괜찮아?" 

 

 

옆을 보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이사쿠였다. 라이조는 몸을 일으켰다. 보건실인가? 물수건을 든 란타로와 후시키조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가 왜 여기 있죠?"

 

"기억안나?"

 

"라이조 선배, 갑자기 쓰러졌어요."

 

 

내가 옮겼어! 타케야가 불쑥 튀어나왔다. 

 

 

"사부로는?" 

 

 

옆에 없는 것을 잠깐 의뭉스럽게 생각했지만, 곧 사부로는 칸에몽과 함께 학원장의 심부름을 받아 아침부터 자리를 비웠던 게 떠오른다.

 

 

"나 얼마나 쓰러져있던 거야?"

 

 

창문을 보니 아직 대낮이긴 하다. 타케야는 "한 3시간?" 대답해줬다. 그렇구나.

 

 

"뭔가 긴 꿈을 꾼 거 같은데..."

 

"아마 얘 때문일거야." 

 

 

타케야는 미안한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통 안에 갇힌 벌레를 보여줬다. 아니, 이게, 새로 잡아온 건데, 탈출을 했었더라고. 하하하. 

 

 

"이게 무슨 벌렌데?"

 

"아, 이건 말이지, 얘 이름은 메몽이라고 지었는데, 여기 이빨이 작게 있거든? 근데 여기에서 독이 나와서..."

 

"응..."

 

"꿈을 꾸게 해주는 벌레래."

 

"아~."

 

 

설명이 주절주절 길어졌다. 성충이었다면 7일간이나 의식이 날아갔을 수도 있다고. 그 말은 들은 라이조는 말했다. 와, 또 물리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퍽 건조한 대답이었다.

 

 

6

 

 

 

사부로는 학원 입구에서부터 보건실까지 거의 날아가다시피 뛰었다. 코마츠다가 별 생각없이 「그러고보니 후와 군, 쓰러졌다던데영.」 말했기 때문이다. 라이조오오오오!!!! 문을 벌컥 열자, 침대는 비어있고 란타로와 이사쿠가 떨떠름한 미소로 맞이했다.

 

 

"라이조 선배라면 아까 방으로..."

 

 

말도 안 끝났는데 사부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학원장 심부름 따위 가는 게 아니었어! 방학 숙제도 쌩깠는데 심부름이 뭐가 대수라고. 앞으로 다시는 라이조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사부로는 방 문 앞에 섰다. "라..." 그러나 문 손잡이에 손을 올리기도 전에 먼저 벌컥 열리는게 아닌가.

 

 

"사부로." 

 

 

웬일인지 라이조가 먼저 팔을 벌렸다. 어서와.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기에 사부로는 홀라당 안겼다. 라이조,너..., 괜찮아? 뭐 물어보기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라이조가 선수를 쳤다. "사부로." 꽤 드문 일이다. 응? 대꾸하기 전에 말이 먼저 이어졌다. 나, 네가 너무 보고싶었어. 그리고 라이조는 한참동안이나 사부로를 껴안다가, 떨어져서 손을 잡고, 손끝을 매만진 후에, 영문을 모른 채 굳어있는 친구의 가면 위에 입을 한 번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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